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AI 반도체 수출 신기록 썼지만...공장 밖 청년 고용은 얼어붙어

HBM 수출 쏠림에 멈춰 선 고용...실물로 흐르지 않고 금융에 갇힌 수익

리지

AI 반도체 낙수효과4분

Illustration by Gemini

경기 이천시 부발읍 SK하이닉스 본사 정문 앞에는 교대 인력을 실어 나르는 버스가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버스에서 내린 기술 인력이 정문을 지나 사옥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맞은편 불 꺼진 상가 건물 유리창에는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466억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반도체 단일 품목이 전체 수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지만, 8월 국내 제조업 일자리는 3만8000개나 줄어들며 극명한 대비를 보였다. AI 반도체 낙수효과는 첨단 수출 호황의 온기가 일자리 창출과 가계 소득으로 이어지면서 내수 경기 전반을 부양하는 선순환을 뜻한다. 하지만 생산 현장의 높은 담장 밖에서는 수출 호황의 결실을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고용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집계를 보면 8월 반도체 수출액은 466억 5,000만달러에 이르러 지난해 8월보다 두 배 넘게 급증했다. 인공지능 연산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수요가 폭증하면서 전체 수출 전선을 홀로 지탱한 결과다.

하지만 공장 담장 밖의 노동시장과 골목 상권은 정반대 상황이다. 국가데이터처 고용동향을 보면 8월 제조업 취업자는 3만 8,000명 줄었고, 내수 경기를 지탱하던 건설업 취업자 역시 3만 2,000명 감소했다.

일자리를 찾는 청년층 취업자는 14만 3,000명 줄어 46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고, 청년 고용률 역시 44.1%로 떨어지며 2년 넘게 하락세를 기록했다. 휴가철 대목인 8월 숙박·음식점업 취업자도 6만 1,000명 줄어들면서 상반기 전국에서 폐업을 신고한 자영업자 역시 62만 4,000명에 이르렀다.

과거 한국 경제의 성장 공식은 달랐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제조업 호황기에는 대기업 완제품 수출이 늘어나면 부품과 원자재를 납품하는 중소 협력업체로 일감이 이어졌고 전국 산업단지 공장들은 대규모 신규 생산 인력을 채용했다. 그렇게 일자리를 얻은 노동자들이 급여를 받아 소비하면서 대기업 수출의 성과는 가계 소득과 골목 상권의 내수 소비로 골고루 퍼졌다.

대기업 수출 성과가 하청 기업과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로 차례차례 전달되는 경제 선순환의 파급 경로가 온전히 작동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1990년대 컴퓨터와 초고속 통신망 보급기에도 대규모 전산화 설비투자와 함께 수많은 소프트웨어 벤처와 서비스업이 생겨나며 두터운 중산층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지금의 AI 반도체 호황은 이 파급 경로 자체가 근본적으로 단절돼 있다. 첨단 HBM과 고성능 D램을 양산하는 공장은 고도화된 설비와 정밀 알고리즘이 주도하는 초자본집약 산업이다. 축구장 수십 개 규모의 대형 공장 내부에서는 천장의 무인 자동 운송 시스템이 웨이퍼를 나르고 전산망이 공정을 통제하므로 사람이 머물 공간이 거의 없다.

수십조 원의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더라도 거대한 공장에 상주하는 인력은 설비를 유지 보수하는 소수의 전문 엔지니어뿐이다. 투자 10억원당 생겨나는 일자리 수를 나타내는 취업유발계수 역시 반도체 산업은 1.56명에 그쳐 자동차 제조업과 비교하면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설비투자에 들어가는 대규모 자금도 국내 생산 생태계로 유입되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간다. 첨단 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공급하고, 주요 증착과 식각 장비 역시 미국 기업들이 과점하고 있다. 대당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첨단 핵심 장비를 수입하느라 국내 기업이 수출로 벌어들인 투자 재원의 상당 부분이 해외 장비업체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간다.

글로벌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지적했듯이 대만은 TSMC를 정점에 두고 설계와 파운드리, 패키징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전문 기업망을 구축해 호황의 과실을 엔지니어 계층 전반으로 고루 나누었다. 반면 한국은 소수 대기업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에 과도하게 편중되어 있어, 호황의 성과가 취약한 산업 생태계에 가로막혀 소수 대기업 내부에만 머무는 구조다.

SK하이닉스의 6월 말 기준 현금성 자산은 88조원에 이르렀다. 지난 3월 말 55조원에서 불과 석 달 만에 60%인 33조원이나 불어난 규모다. 하지만 이렇게 축적된 잉여 현금은 새로운 실물 일자리 창출이나 국내 장비 기업 육성에 쓰이지 못하고 고스란히 금융시장으로 유입됐다.

올해 들어 SK하이닉스는 우량 회사채와 금융채를 20조원 매입했고, 지난달에는 4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결정했다. 실물 경제로 이어지는 투자 경로가 막히자 반도체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이 채권시장과 자사주 소각이라는 금융시장 내부에서만 공회전하고 있다.

물론 반도체 대기업이 분기마다 막대한 영업이익을 올리면 시차를 두고 법인세수가 늘어나 정부 재정을 통해 취약 계층으로 소득이 이전될 수 있다는 반론이 있다. 자사주 소각과 배당 확대로 주주들의 자산 가치가 올라 소비로 이어져 내수 경기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 섞인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반도체 시설투자에 주어지는 대규모 세액공제 혜택으로 인해 기업 영업이익 증가가 실제 정부 세수 확충으로 직결되는 비율은 기대보다 훨씬 낮다.

주주환원으로 풀린 자금 역시 내수 소비로 흘러가기보다는 또 다른 금융상품이나 해외 주식 재투자로 쏠리는 경향이 짙다. 시장 기능으로 작동하던 민간 파급 경로가 멈춰 선 자리를 정부 재정도 채우지 못하면서 생산, 분배, 소비를 잇는 경제 선순환 구조가 양쪽에서 모두 마비된 실정이다.

앞으로 이 구조적 단절을 검증할 지표는 세 가지다. 첫째는 한국은행이 발표할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 잠정치에서 가계 씀씀이를 보여주는 민간소비와 설비투자의 기여도다. 지난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 성장률 0.6% 중 순수출 기여도가 0.3%포인트였던 상황에서 반도체의 단독 성장이 내수 회복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해야 한다.

둘째는 국가데이터처의 9월과 10월 고용동향에서 제조업과 청년층 취업자 수가 실제로 반등하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반도체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동안에도 청년 고용률 하락이 이어진다면 일자리 단절은 구조적 현실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세금을 투입한 단기 일자리를 제외하고 민간 제조업이 양질의 청년 일자리를 실제로 창출하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셋째는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잉여현금흐름 대비 국내 실물 투자와 금융자산 운용 비중의 변화다.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돈이 공장 증설과 국내 협력사로 흐르는지, 채권 매수와 금융 자산으로만 환류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기업 내부에 쌓인 막대한 유동성이 실물 경제로 유입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천의 반도체 공장을 나서는 통근버스는 오늘도 교대 근무를 마친 기술 인력을 태우고 공장 앞 도로를 지나 수도권 각지로 향한다. 이들이 지나친 맞은편 상가 건물에는 여전히 임대 안내문이 걸려 있고, 9일 발표된 국가데이터처 통계에서도 청년 취업자는 46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466억 5,000만달러라는 사상 최대 수출 실적 뒤편에서 우리 경제의 소득 순환 경로는 실물 경제와 완전히 단절된 채 멈춰 서 있다.

한국은행은 5일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이 전기 대비 0.6%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 생산 호조에도 불구하고 민간소비와 설비투자의 회복세는 여전히 미약한 수준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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