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경제학

세상의 흐름

미국 원전 8기 부활에 한국 돈과 손을 부른다...설계도 쥔 주인의 위험한 외주

40년 만에 본토 원자로 재건 나선 미국...시공 기반 붕괴 속 한국에 지분 인수와 위험 분담 요구

리지

미국 원전 건설4분

Illustration by Gemini

경남 창원에 자리한 두산에너빌리티 단조 공장 한가운데서는 1만 7,000톤 프레스가 굉음을 뿜어낸다. 붉게 달아오른 수백 톤의 강철 덩어리가 유압 피스톤에 눌려 결을 바꾼다. 현장 기술자들은 백오십 기압의 고압과 방사선을 견뎌내는 원자로 핵심 부품인 강철 그릇, 곧 압력용기를 이 거대한 쇳덩이를 두드려 완성한다.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일의 중심에는 콘크리트를 부어 벽체를 굳히는 틀인 "거푸집"이 있다. 아무리 정교한 설계도가 책상 위에 놓여 있어도, 건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철근을 엮고 거푸집을 단단히 세워 콘크리트를 굳히지 못하면 발전소는 땅 위에 바로 설 수 없다.

한국 협상단은 지금 대미투자펀드를 통해 미국 본토에 대형 원전 8기를 짓는 원전 프레임워크를 조율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미국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의 지분 5%에서 10%를 인수하고 현지 원전 시공에 참여하는 구상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전력 부족에 직면한 미국 정부가 반세기 만에 대규모 원전 증설의 문을 열며 한국에 손을 내밀었다.

미국 엔지니어들이 본토에서 상업용 원자로 공사를 멈춘 지 사십 년이 넘었다. 1979년 3월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 섬(TMI) 원전 사고 이후 미국에서는 대형 원자로 발주가 완전히 끊겼다. 원전을 짓지 않는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거대한 단조 설비는 해체됐고, 두꺼운 합금강을 녹여 붙이는 일을 업으로 삼던 숙련 용접공과 현장 관리자는 건설 현장을 떠났다.

오랜 공백의 대가는 참혹했다. 미국 유틸리티 기업들이 수십 년 만에 추진했던 조지아주의 원자력발전소인 보글 3·4호기 사업에서는 현장 시공 기반의 붕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첫 삽을 뜰 당시 140억 달러로 잡았던 총공사비는 350억 달러로 폭증했다. 배관 진동과 배선 결함이 이어지며 완공은 당초 목표보다 일곱 해나 밀린 끝에 마무리됐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함께 추진되던 V.C.서머 원전 사업은 90억 달러를 투입하고도 절반도 짓지 못한 채 공사가 영구 중단됐다. 땅을 파다 버려진 원전 부지는 미국 건설 공급망의 무덤이 됐다. 조지아주 주민들은 보글 발전소의 눈덩이 공사비를 메우기 위해 매달 전기요금 청구서에 추가 분담금을 물고 있다.

시공 능력의 실종이 부른 비용 폭증은 주기기 제작사인 웨스팅하우스를 2017년 파산으로 몰고 갔다. 원전 르네상스를 노리고 54억 달러에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했던 일본 도시바는 7,000억 엔이 넘는 부실을 떠안았다. 도시바 경영진은 알짜 사업이던 반도체 부문을 매각하고 주식시장 상장폐지로 내몰렸다. 도면만 쥐고 현장 시공 능력을 통제하지 못한 자본이 맞은 비참한 결말이었다.

한국 기술자들의 궤적은 정반대였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원자로 건설을 단 한 해도 쉬지 않았다. 1978년 고리 1호기를 준공할 당시 한국 기술진은 도면 한 장 그리지 못했다. 웨스팅하우스가 건넨 턴키 계약서에 따라 현장 인부들이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붓는 기초 노무를 맡았을 뿐이다. 당시 고리 1호기 건설비 1,560억원은 정부 한 해 예산의 4분의 1에 달했고 전액 외채로 충당했다.

한국 노동자들은 멈추지 않고 배웠다. 고리에서 출발해 한빛과 한울, 신고리로 이어지는 스물여덟 기의 원전을 차례로 지으며 기자재 국산화를 이뤄냈다. 이어 수주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네 기는 오십 도의 사막 모래바람 속에서도 공기와 예산을 정확히 지켜내며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전 제조와 시공의 현장 규율을 온전히 지켜낸 나라로 자리 잡았다.

이 차이는 공인된 수치로도 확인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와 경제협력개발기구 원자력기구(OECD NEA)의 발전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원전 건설비는 킬로와트(kW)당 3,571달러 수준이다. 6,000달러를 가볍게 넘기고 보글 사업처럼 1만 달러에 육박하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절반에 못 미친다. 약속한 날짜에 거푸집을 굳히고 부품 불량을 잡아내는 현장 통제력이 원가 격차를 낳았다.

원천기술을 쥔 미국이 한국을 다급히 부른 배경도 여기에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력망 안정을 위해 대형 원자로 8기를 추가로 짓겠다고 공언했지만, 미국 땅에는 원자로 압력용기를 찍어낼 만 톤 프레스 설비가 전무하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품질 규격을 맞추며 두꺼운 강판을 이어 붙일 숙련공의 평균 연령은 50세를 넘어섰다. 한국의 공장과 현장 인력이 없으면 미국은 도면 속 활자를 실제 발전소로 구현할 길이 없다.

문제는 미국이 요구하는 금융과 계약 조건이다. 미국은 한국형 노형인 APR1400을 미국 땅에 올릴 경우 1기당 20억 달러 안팎의 기술료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웨스팅하우스 지분 인수와 대미 펀드 투자를 통해 한국 자본이 수조 원을 대고 현장 시공의 위험을 함께 지라고 압박한다. 도면의 권리는 비싸게 팔고 현장에서 터질 공기 지연의 손실은 한국에 떠안기는 구조다.

원천기술과 특허권을 쥔 미국 시장에 안착하고 오랜 지식재산권 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지분 참여와 기술료는 불가피한 입장료라는 반론이 있다. 미국 당국의 인허가 문턱을 넘고 세계 최대 전력 시장을 열기 위한 현실적 타협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종이에 인쇄된 특허 도면만으로는 현장의 암반을 뚫고 변전소로 전기를 보낼 수 없다. 원전 사업의 성패는 특허권의 유무를 넘어 하루 공기가 지연될 때마다 수십억 원씩 불어나는 금융비용을 통제하는 시공의 규율에서 판가름 난다. 보글 현장을 멈춰 세운 원인은 도면의 계산식이 결코 채워주지 못한 현장 인력의 숙련도 부족이었다.

사모펀드 운용역들은 고위험 건설 투자를 직접 감당하기보다 수수료와 배당만 챙기려 한다. 현재 웨스팅하우스 대주주인 사모펀드 브룩필드와 우라늄 기업 카메코의 계산도 같다. 과거 도시바를 삼켰던 덫이 바로 이 지점에 도사리고 있다. 도시바는 원전 산업의 부흥이라는 구호에 취해 현장의 시공 위험을 얕본 채 지분을 샀다가 공기 지연으로 불어난 천문학적 추가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미국이 한국에 지분 인수와 자금 조달을 요구하는 까닭은 또다시 터질 공기 지연의 충격을 흡수할 금융 완충재를 확보하려는 포석이다.

앞으로 투자자들이 주시할 지표는 텍사스와 조지아 등 미국 신규 원전의 착공 계약에 찍힐 조건이다. 공사비가 불어났을 때 시공사가 이를 메워야 하는 고정가 턴키인지, 발주처가 비용을 보전해 주는 실비정산 방식인지가 첫째 시험대다. 한국 기업이 취득할 웨스팅하우스 지분에 실질적인 이사회 의결권이 주어지는지도 협상의 실리를 가늠할 잣대다.

창원 공장에서 프레스의 압력을 견디며 식어가는 거대한 원자로 단조품은 서류로는 보증할 수 없는 쇳물의 무게다. 이 강철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세워질 때, 반세기 동안 현장의 흙먼지를 마시며 거푸집을 채워온 한국 제조망의 현장 통제력도 함께 입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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