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36.5도 가리키는 고장 난 체온계...연준과 한은이 놓친 진짜 물가
미국 주거비 18개월 후행에 한국 자가주거비 0% 방치...평균치 맹신이 부른 통화정책 실기

진료실 체온계 수은주는 온도의 높낮이를 가리키는 눈금 사이를 오르내린다. 열이 치솟아 병원을 찾은 환자가 이마를 짚으며 신음하지만, 체온계는 36.5도 정상 체온을 가리키고 있다. 센서가 빗나갔거나 눈금이 어긋났을 때 기구는 정상을 가리키지만 환자는 고통을 겪는다.
각국 중앙은행이 미국 노동통계국이 집계하는 소비자물가지수(CPI)나 연방준비제도가 통화정책 기준으로 삼는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가 2% 목표치로 떨어졌다고 안도할 때, 시민들의 장바구니 체감이 여전히 무거운 이유도 물가 측정 방식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지표가 가리키는 안정과 실제 체감하는 고통은 다르다. 모든 품목의 변동을 하나로 묶어 계산하는 평균 방식 자체가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으니 말이다.
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8월 28일 잭슨홀 연례회의 기조연설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워시 의장은 헤드라인 수치가 낮아졌다고 해서 물가의 기저 흐름이 돌아선 것은 아니라고 밝히며, "기저 인플레이션이 목표를 향해 명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65개월 동안 이어진 고물가의 책임이 중앙은행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단일 평균치 대신 기저 물가를 포착할 새 지표를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던진 것이다.
주택 가격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왜곡은 반복됐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은 1983년 금리를 올릴 때마다 대출 이자 부담이 커져 지표가 더 뛰는 현상을 막기 위해, 주택 매매가와 대출 금리를 물가 산식에서 완전히 제외했다. 대신 집주인에게 집을 세놓으면 임대료를 얼마나 받겠느냐고 묻는 설문 조사를 거쳐 가상의 "자가주거비(OER)" 항목을 도입했다.
이 40년 된 방식은 오늘날 통화정책의 판단을 흐리는 걸림돌이 됐다. 자가주거비는 1년 안팎의 임대차 계약 주기를 거치기 때문에 실제 시장 시세보다 12개월에서 18개월 늦게 통계에 반영된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주거비 비중은 36.2%에 달하고 그중 자가주거비가 26.8%를 차지한다. 3분의 1이 넘는 항목이 과거 숫자에 묶여 움직이다 보니, 연준은 시장 임대료가 꺾인 뒤에도 긴축을 늦추지 못했고 집값이 뛸 때는 조기 대응 기회를 놓쳤다.
평균치 계산과 주거비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통계적 대안으로 떠오른 지표가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의 "중위수 CPI(Median CPI)"와 댈러스 연은이 가격 변동의 양 극단을 잘라내 산출하는 "절사평균 PCE(Trimmed Mean PCE)"다. 이들 지표는 개별 품목의 가격 상승률을 순서대로 세운 뒤 양 극단의 수치를 제외하거나, 전체 가중치의 정확히 50% 지점에 위치한 품목의 변동률만 산출한다.
달걀이나 중고차 가격이 단기 공급 충격으로 뛰어도, 중위수 지표는 소수 품목의 일시적 등락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와 연은의 분석에 따르면, 중위수 물가는 지난 30년간 1~2년 뒤 인플레이션 추세를 예측하는 정확도에서 헤드라인 CPI나 전통적인 근원물가보다 오차가 30% 이상 작았다.
물론 중위수나 절사평균 지표만으로 통화정책을 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 급등에 시달리는 시민들에게 양 극단을 뺀 통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수치로 비쳐 중앙은행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특정 품목의 가격 상승에서 시작되므로, 절사평균이 이를 단순 잡음으로 보고 제외하면 경제 전반으로 번지는 2차 인플레이션 신호를 놓칠 위험도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개별 품목의 일시적 충격보다 경제 전반의 기저 압력을 봐야 한다. 일시적 수급 불균형에 대응해 금리를 급격히 올리면 실물경제와 고용에 불필요한 충격을 주는 만큼, 일시적 충격이 임금과 서비스로 번지는 파급 효과를 가려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한국의 지표는 미국보다 더 왜곡돼 있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공식 소비자물가지수에는 자가주거비가 빠져 있어, 전체 가중치 1,000 중에서 주택 임차료는 전세 54.0과 월세 43.6을 합쳐 97.6에 그친다. 통계청 주택소유통계에 따르면 전체 가구 가운데 자기 집에 사는 비율인 자가보유율은 61.3%에 달하지만, 1,000만 가구가 넘는 자가 거주자의 주거비 변동은 공식 물가 통계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주거비 누락은 정책 실패로 이어졌다. 서울 아파트값이 급등하던 2020년과 2021년 공식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에서 1%대에 머물렀다. 주택 가격 상승세가 통계에 반영되지 않자 한국은행은 연 0.5%의 초저금리를 이어갔고, 저물가 착시 속에 풀린 유동성은 가계부채 2,000조원 돌파라는 부담으로 이어졌다.
통계 당국도 문제를 파악해 1995년부터 자가주거비 포함 지수를 보조지표로 산출해왔다. 하지만 30년 넘도록 주지표로 전환하지 못했다. 국민연금 지급액부터 기초생활보장 급여, 건강보험료 부과 기준까지 여러 복지 정책과 법적 기준이 소비자물가지수에 연동돼 있어, 자가주거비를 반영해 지수가 오르면 정부의 재정 지출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역시 가중중위수 물가와 10% 절사평균 물가를 별도로 산출하며 기저 압력을 살피고 있지만, 공식 목표와 시장 소통은 여전히 주거비가 빠진 소비자물가지수에 묶여 있다. 지표가 멈춰 선 상태에서 정책 결정자들은 보조 지표를 살피며 대응하고 있다.
다음 분기에 지켜볼 지표는 클리블랜드 연은의 "중위수 CPI"와 한국은행의 "가중중위수 물가상승률"이다. 헤드라인 물가 수치가 움직일 때 가중치 정중앙에 위치한 품목들의 가격 변동이 2% 목표선 안으로 들어오는지 살펴야 하며, 양 극단을 뺀 중간 숫자가 3%대 위에 머물고 있다면 인플레이션 압력은 여전한 상태다.
진료실 체온계는 유리관 속에 수은을 담고 있다. 환자가 고열에 시달리는데 체온계가 36.5도를 가리키고 있다면 기구가 고장 난 것이듯, 왜곡된 지표에 의존한 통화정책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때 치러야 할 비용은 실제 물가 상승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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