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
미발표 지하철 "노선도" 쥔 관료들...싱가포르 청렴 신화 뒤의 사각지대
미발표 전철역 주변 아파트 선점해 연 8만달러 초과 차익...고액 연봉으로 부패 막는다는 엘리트 관료주의의 맹점

교통 정책을 총괄하는 싱가포르 육상교통청(LTA) 기획실에는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지하철(MRT) 미개통 "노선도"가 걸려 있다. 일부 관료들은 시민들이 보는 벽면 지도에 빈터로 남아 있는 자리에 장차 들어설 역의 위치와 환승 지점을 미리 알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 연구기관 전미경제학회(NBER)가 9월 발표한 실증 연구에 따르면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미발표 지하철역 반경 1km 안의 민간 아파트를 일반인 대조군보다 60% 이상 더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콜럼비아대와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1995년부터 2019년까지 싱가포르의 부동산 소유권과 거래 기록을 관리하는 행정기관 토지등기소에 접수된 25년간의 부동산 실거래 내역 전수를 공무원 인명부와 교차 검증했다. 지하철 노선 계획을 공식 발표하기 1~2년 전 공무원들의 역 예정지 주변 아파트 매입 확률은 대조군에 비해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들이 나중에 아파트를 되팔아 챙긴 초과 시세 차익은 보유 기간 1년마다 싱가포르달러로 평균 8만달러(미화 약 6만 2,000달러)에 달했다.
이 통계는 그동안 싱가포르가 쌓아 올린 엘리트 관료주의의 청렴에 대한 신뢰를 뒤흔들었다. 1965년 독립 이후 리콴유 초대 총리는 천연자원도 영토도 없는 도시국가의 생존 조건으로 엄격한 청렴을 강조했다. 공직 부패를 차단하기 위해 싱가포르 정부는 단순한 처벌을 넘어 우수한 인재를 공직으로 끌어들이고 유혹을 차단하려면 민간 최고 수준에 뒤지지 않는 파격적인 보수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은 1994년 싱가포르 정부가 펴낸 "경쟁력 있는 보수와 정직한 정부" 백서로 명문화됐다. 정부는 장관과 고위 관료의 급여를 민간 대기업 최고경영자와 대형 로펌 변호사 소득의 상위권에 연동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장관 초봉은 110만 싱가포르달러, 총리 연봉은 220만 싱가포르달러 선에 책정해 공직자가 사익을 넘볼 기회비용을 세계 최고 수준의 급여로 원천 차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 전략은 수십 년간 빈틈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싱가포르는 해마다 세계 5위 안에 이름을 올리며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국가라는 위상을 굳혔다. 시민들은 각료들의 천문학적인 연봉을 세금 낭비로 보지 않고 부패 없는 행정 서비스를 누리기 위한 정당한 비용으로 받아들였으며 높은 급여가 공직 사회의 청렴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지탱한다는 믿음도 오랫동안 굳건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인플레이션 환경에서 이 정교한 균형은 허점을 드러냈다. 연봉이 아무리 높아도 근로소득의 증가는 일정한 반면 도시계획과 인프라 독점 정보가 낳는 자본 이득은 단숨에 몇 배씩 늘어났다. 역이 들어서면 땅값이 두세 배씩 뛰는 좁은 섬나라에서 미발표 "노선도"에 찍힌 점 하나는 수십 년 치 급여를 단숨에 앞지르는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수 있었다.
연구진이 밝혀낸 세부 실태를 보면 거액의 연봉을 받는 최고위직보다 실무 결재선에 있는 중간 관리자와 철도망 계획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 관련 부처 관료들의 매입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노선 발표 직전까지 닫혀 있던 "노선도"의 미공개 정보를 활용해 역세권 분양권을 사들였고 노선 계획이 세상에 공개돼 가격이 치솟은 뒤 매각해 시세 차익을 거뒀다.
최근 정부가 물가 상승과 민간 임금 격차를 이유로 각료 연봉을 최대 9%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하던 와중에 논문이 발표되면서 싱가포르 정부는 더욱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이미 연봉 10억원이 넘는 고위직의 보수를 더 올려줘야 부패를 막는다는 당국의 명분은 8만 싱가포르달러의 연간 부동산 차익 통계 앞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파문이 확산하자 싱가포르 공공서비스청(PSD)은 연구 자료와 분석 방식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통계적 상관관계만으로 개별 공무원의 실제 내부 정보 이용을 단정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비위의 구체적 근거가 확인될 경우 반부패 전담 사정기구인 탐오조사국(CPIB)에 곧바로 정식 수사를 의뢰하겠다고 덧붙였다.
물론 싱가포르 정부도 관료들의 부동산 선점을 마냥 방치하지는 않아 공무원들의 미발표 역세권 주택 매입은 정부가 공직자 재산 등록과 이해충돌 심사를 대폭 강화한 2011년을 기점으로 뚜렷하게 줄어들었다. 투명한 감시망이 강화되고 위반 시 파면과 연금 박탈이라는 중징계 위험이 커지자 비정상적인 거래 행태가 멈췄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싱가포르 모델의 핵심 전제를 뒤흔든다. 관료들이 투기를 멈춘 배경에는 거래를 추적하고 처벌하는 법적 강제력과 규제 도입이 있었고 전미경제학회 논문의 결론처럼 사회적 규범은 결코 제도적 강제 집행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확인됐다.
이 뼈아픈 역설은 2021년 3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광명·시흥 3기 신도시 지정 직전 토지를 매입하고 묘목을 심어 보상금을 챙긴 사태를 겪은 한국 공직 사회의 현실을 정면으로 겨눈다. 개발 업무를 맡은 공공기관 직원들이 업무 과정에서 얻은 비공개 개발 정보를 사적 재산 증식의 통로로 삼았다는 점에서 싱가포르의 지하철역 선점과 본질이 통하는 장면이었다.
한국 일각에서는 공무원의 보수가 민간 기업의 83% 수준에 머물러 유혹에 취약해진다는 점을 들어 처우를 대폭 개선해야 공직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실증 연구 결과를 보면 연간 10억원이 넘는 고액 급여를 받더라도 자산 시장의 레버리지가 소득을 압도하는 순간 보수 수준으로는 부패를 억제하기 어렵다는 점이 확인된다.
한국은 LH 사태 이후 2022년 5월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을 제정해 시행하면서 공직자가 업무상 비밀이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면 최고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빗장을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자치단체의 도시계획 심의나 교통망 확충 정보를 둘러싼 이해충돌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은 도시 인프라 개발의 열매를 가장 직접적으로 흡수하는 자산이어서 한국 공직 사회에서는 직책보다 부동산 자산이 남는다는 "직보다 집"이라는 말이 통용되어 왔다. 고위 공직자가 승진이나 임명을 위해 다주택을 처분했다가 훗날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의 시세 차익을 놓치고 뼈아프게 후회하는 일이 실제로 빚어졌다. 제도가 아무리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해도 자산 가격의 격차가 공직의 명예를 넘어서는 구조는 싱가포르나 한국이나 닮아 있다.
공직 사회의 청렴과 자산 시장의 충돌을 가늠할 지표는 향후 공개될 두 통계에 있다. 싱가포르 탐오조사국이 이번 전수조사 검토 끝에 내놓을 실제 기소와 징계 처분 결과가 그 첫 번째이고 한국에서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상반기와 하반기마다 집계하는 이해충돌 방지법 위반 신고와 미공개 정보 이용 적발 건수의 추이가 두 번째다. 적발 건수가 줄지 않는다면 법과 규범 사이의 간극이 여전히 메워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지하철역 출구에 붙어 있는 "노선도"는 본래 수많은 시민을 안전하게 실어 나르기 위한 공공의 약속이지만 그 약속이 발표되기 전 누군가의 손에서 사적 이익을 노리는 투자 지도로 변질될 때 공직의 신뢰는 무너진다. 공직의 청렴을 지탱하는 힘은 막대한 연봉보다 빈틈없는 감시와 집행의 제도에서 나온다. 그리고 싱가포르 토지등기소에 기록된 25년간의 거래에서 규제가 헐거웠던 시절 역세권을 매입한 공무원들의 평균 주택 보유 기간은 6년 2개월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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