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맥주 팔려고 공짜로 돌린 책, 이제 판정을 파는 회사
1955년 초판 1,000부는 영국 술집에 공짜로 배포...지금은 심판관 한 번 부르는 데 7,500파운드
1955년 8월 27일 런던 플리트가 107번지에서 책 한 권이 출간됐다. 198쪽짜리 이 책 표지에는 맥주 회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표지에 맥주 회사 이름이 붙은 사연은 4년 전 아일랜드 웩스퍼드의 사냥터에서 시작됐다. 기네스 양조장 사장이 물떼새를 놓친 뒤 저녁 술자리에서 그 새가 유럽에서 가장 빠른 사냥새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답을 찾던 그는 세상 어디에도 이런 최고 기록을 정리해 둔 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사실 확인 조사업체를 운영하던 쌍둥이 노리스와 로스 맥워터에게 책 편찬을 맡겼다.
당초 기네스는 이 책을 판매할 생각이 없었다. 초판 1,000부를 찍어 영국과 아일랜드 술집에 무료로 배포했다. 판촉용이었던 만큼 팔 상품은 맥주였고 책은 손님을 자리에 더 오래 머물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술집에 비치된 책을 집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당해 크리스마스에 영국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이듬해 미국에서 7만 부가 팔렸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그사이 기네스가 손에 쥔 실권은 판정의 권위였다. 누가 가장 빠르고 무엇이 가장 큰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질 때 시비를 가려줄 최종 심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런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터의 길이는 국제기구가 정해 주지만 세상의 "가장"을 공인해 주는 곳은 없었다. 이 빈자리를 맥주 회사가 선점했고 먼저 차지했기에 곧 독점적 기준이 됐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그 자리의 가치는 둘로 갈라졌다. 어느 새가 더 빠른지 몇 초면 검색으로 확인되면서 단순 사실의 가치는 사라졌다. 끝내 남은 것은 판정의 권위였고 회사는 이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했다. 공식 심판관이 행사장을 찾아 현장에서 기록을 공인해 주는 비용은 7,500파운드, 우리 돈 1,400만원가량이다. 인증 로고를 1년 동안 광고에 쓰려면 2만4,000파운드, 4,400만원을 내야 한다. 회사 측도 자사의 사업을 브랜드가 "진짜 언론의 주목을 만들어 낼 이야기"를 갖도록 돕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무료로 신청하는 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심사가 지극히 느리다. 결국 가격은 빠른 처리를 원하는 쪽에만 붙는다.
공인 판정을 파는 위치에 서자 무엇을 심사할지 결정하는 주도권도 회사가 쥐게 됐다. 이에 따라 위험하거나 논란을 부르는 종목은 스스로 폐지했다. 1989년에는 많이 먹기 43종을 삭제했고 1997년에는 수면 참기를, 1998년에는 가장 무거운 반려동물 부문을 제외했다. 반려동물 종목을 없앤 것은 기록이 실린 뒤 주인들이 개와 고양이에게 먹이를 억지로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종목을 지우는 손길이 있는가 하면 새로 만드는 손길도 있는데 이쪽은 대개 든든한 비용을 치르는 고객이다. 아랍에미리트가 보유한 기네스 기록 526개 가운데 21개는 경찰 조직의 것이다. 이집트의 보유 기록도 10년 사이 22개에서 110개로 늘었다.
이렇게 축적된 기록은 현재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5만3,000개 들어 있다. 기록집 역시 40개 언어로 1억5,000만 부가 팔려 나갔다. 정작 이 데이터베이스의 소유권은 맥주 회사를 떠나 여러 차례 손바뀜을 거쳤고 2008년부터는 캐나다의 유통·미디어 지주회사인 짐 패티슨 그룹에 귀속돼 있다. 무엇이 세계 최고인지를 가리는 자리가 그렇게 팔려 다니는 동안 그 공인 기준을 다시 짜자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술집 말다툼을 끝내려고 공짜로 돌렸던 책이 이제는 하루치 대가를 받고 최고를 가리는 심판석을 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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