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바닷새로 2000년 버틴 섬, 현금이 들어온 뒤 남은 36명
1727년엔 영주가 사람을 데려와 빈자리 채워...1930년엔 아무도 채우지 않아
1930년 8월 29일 오전 7시, 스코틀랜드 서쪽 대서양의 외딴 군도 세인트킬다 빌리지만에 적막이 감돌았다. 주섬 히르타에 남았던 주민 36명은 이날 아침 집집마다 성경을 펴 두고 곁에 귀리를 한 줌씩 얹은 채 문을 걸어 잠갔다. 이틀 전 관광선 두나라캐슬호가 소와 양을 본토로 싣고 가 처분해 마을 안에는 남겨진 가축조차 없었다. 주민들은 텅 빈 마을을 뒤로하고 영국 해군 함정 하리벨호에 올랐다. 청동기시대부터 2,000년 넘게 이어진 거주의 역사가 이 배와 함께 섬을 떠났다.
세인트킬다 주민들의 살림은 외부 물자를 사들이지 않고 섬에서 나는 것만으로 꾸려 가는 자급 경제 체제였다. 식량과 연료는 물론 영주에게 내는 지대까지 모두 섬 안에서 얻었고, 그 중심에는 절벽에 둥지를 튼 바닷새가 있었다.
군도는 해리스 영주 매클라우드 가문의 소유였고 지대 역시 현물로 거뒀다. 영주가 거둘 공물은 곧 주민의 양식이었고, 그 양식의 원천은 바닷새 포획이었다. 1764년 조사에 따르면 주민 90명이 하루에 새알 36개와 바닷새 18마리를 소비했다.
여름 한철에 몰리는 새를 겨우내 먹으려면 저장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무가 자라지 않는 섬이라 훈연을 할 수 없었고 소금도 귀했다. 유일하게 기댈 방법은 자연 바람이어서, 주민들은 돌을 줄 맞추지 않고 엉성하게 쌓아 바람은 벽을 통과하되 비는 들이치지 않는 창고를 지었다. 이 창고를 클라이트(cleit)라고 불렀고, 히르타에만 1,260채가 서 있고 다른 섬에 170채가 더 남았다. 클라이트 안에는 절인 생선과 새 고기, 깃털, 보리와 감자, 이탄과 건초를 보관했다.
이 창고들을 채우려면 절벽에 오를 작업조가 필요했고, 자급 경제를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인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섬사람들은 일찍이 겪었다. 1727년 두창이 돌아 노를 저을 사람조차 부족해지자 영주가 해리스에서 다른 가족들을 데려와 빈자리를 채웠다. 필수 인원이 다시 갖춰지자 인구는 100명 안팎에서 오래 유지됐다.
이 살림을 현금이 흔들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증기선이 들어오면서 주민들은 손으로 짠 트위드와 새알을 관광객에게 팔아 처음으로 돈을 손에 쥐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해군이 신호소를 세우면서 본토와 매일 연락이 닿았고 우편과 식량도 정기적으로 들어왔다. 살림은 편해졌지만 자급의 기반은 그만큼 약해져, 전쟁이 끝나 보급선 왕래가 끊기자 고립감은 전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젊은 남성들이 섬을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1911년에 74명이던 인구는 1927년 47명으로 급감했다. 1930년에는 36명에 불과해 절벽 작업조조차 꾸릴 수 없었다.
1727년과 달리 이번에는 아무도 사람을 채워 넣지 않았다. 떠나겠다는 결정은 섬사람들이 함께 내렸고 정부가 배를 보냈다. 정부가 남성들에게 배정한 일자리는 산림 작업이었는데, 평생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섬에서 살아온 이들이었다. 이듬해 영주는 군도를 한 조류학자에게 팔았고, 그는 새 보호구역으로 관리하다가 1956년 스코틀랜드 국민신탁에 기증했다.
그렇다고 섬이 빈 채로 남지는 않아, 1957년 미사일 추적 기지가 들어서면서 히르타에는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방산업체 직원들이 한 달씩 교대로 머물며, 국방부가 국민신탁에 내는 임차료는 명목상 액수에 머문다. 여름이면 연구자와 자원봉사자까지 20명에서 70명까지 늘어나지만 정착해 살아가는 주민은 없다. 이들은 섬에서 아무것도 거두지 않아 먹을 것과 연료가 전부 배로 들어오고, 날씨가 나빠 보급이 닿지 않으면 그해 작업 일정이 통째로 취소된다. 2,000년을 스스로 버티던 살림을 이제 밖에서 들어오는 보급선이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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