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노르웨이는 영사관 하나 때문에 연합을 깼다...91년 만의 결별
상선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까지 갔는데 영사는 스웨덴이 임명...선주 출신 총리가 내건 목표는 영사단 하나
1905년 9월 23일 스웨덴 카를스타드에서 노르웨이와 스웨덴 대표단이 연합을 끝내는 조건에 합의했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91년을 한 임금 아래 지낸 두 왕국의 군대가 국경을 사이에 두고 2km 거리에 조용히 배치돼 있었다. 두 나라를 여기까지 끌고 온 발단은 영사관이었다.
영사관은 자국 상선과 상인이 드나드는 외국 항구에 두는 재외공관이다. 두 나라가 1814년 한 임금 아래 연합을 맺은 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영사관까지 스웨덴 외무부가 도맡아 두었다. 노르웨이는 자기 이름으로 된 영사관을 갖지 못했다.
노르웨이 상선은 유럽을 넘어 남북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 아프리카, 아시아로 항로를 넓히고 있었다. 그런데 노르웨이 상선이 닿는 항구의 영사는 스웨덴 외무장관이 임명했고, 그렇게 임명된 사람 중에는 노르웨이인도 스웨덴인도 아닌 현지인이 적지 않았다. 현지인 영사는 노르웨이를 대표하기로 돼 있었지만 노르웨이 사정을 몰랐다. 나라 밖 항구마다 영사관을 두어 엮은 그물을 영사망이라 하는데, 새로 열린 항로는 그 그물이 제대로 덮지 못했다. 스웨덴 외무부가 친 그물은 유럽 위주였다.
영사는 의전을 맡는 자리가 아니다. 배가 드나드는 항구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그 나라의 상거래 사정을 본국에 알리는 실무다. 이런 실무를 두고 다른 서방 국가는 일 잘하는 영사를 외교관으로 올렸는데, 스웨덴은 거꾸로 영사 경험이 없는 외교관을 영사 자리에 보냈다. 유럽에 깔린 영사관은 스웨덴 이익을 앞세웠다. 선박 톤수를 기준으로 걷는 톤세의 개정은 노르웨이 정치권이 당을 가리지 않고 합의한 사안이었지만 그만큼 밀렸다.
1895년 두 나라 사이 자유무역을 보장하던 법(Mellomrikslovene)이 폐지되면서 연합을 지킬 경제적 이유도 줄었다. 10년 뒤인 1905년 초 크리스티안 미켈센이 세운 연립정부가 내건 목표는 노르웨이 영사단을 따로 두는 것 하나였다. 미켈센은 선주였다.
국왕 오스카르 2세가 영사단 설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6월 7일 노르웨이 의회는 만장일치로 연합 해소를 결의했다. 결의문은 물러난 내각에 "헌법에 따라 국왕이 보유한 권한을 행사"할 권한을 준다고 적었다. 8월 13일 국민투표에서 36만8,208명이 찬성하고 184명이 반대했다.
외무부는 결의가 나온 6월 7일 그날 만들어졌다. 이듬해 의회는 유럽에 공사관 여섯 곳, 미국과 아르헨티나에 한 곳씩을 두기로 하고 영사관 20곳을 함께 열었다. 1922년 개편에서는 외교관이 되는 길에 국제무역 실무 경험을 요건으로 넣었다. 스웨덴을 두고 했던 불평이 노르웨이의 채용 기준이 됐다.
노르웨이 외무부는 지금 재외공관 110곳을 두고 본부까지 2,400명가량이 일한다. 인구에 비추면 많은 편이지만 중앙아시아처럼 공관이 아직 없는 지역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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