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제트기에 뺏긴 대서양 바닷길...크루즈로 업을 바꾼 퀸 엘리자베스 2호
승객 95%가 비행기로 떠난 바다...이동 수단에서 체류 공간으로 거듭난 40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67년 9월 20일 스코틀랜드 존 브라운 조선소에서 가위를 들었다. 여왕이 줄을 자르며 "이 배의 이름을 퀸 엘리자베스 2세로 명명한다"고 선언하자 선체가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지만 대서양은 이미 비어 있었다. 제트 여객기가 취항하자 닷새 걸리던 뱃길은 여섯 시간 반 만에 건너는 하늘길로 바뀌었다. 대서양을 오가던 승객의 95%가 비행기에 오르자, 대서양 항로에서 승객을 운송하는 여객선들은 빈 배로 다니다 고철로 팔렸다.
크루즈선은 승객을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나르는 이동 수단을 넘어, 선내 체류 자체를 즐기도록 만든 선박이다. 1960년대 제트 여객기에 바닷길 승객을 빼앗긴 해운사들이 텅 빈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의 쓰임새를 운송에서 관광으로 바꾸며 크루즈선을 본격적으로 띄우기 시작했다.
영국 해운사 큐나드 역시 낡은 여객선들을 대체할 후속 선박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큐나드는 처음에 대형 정기선을 새로 지어 항공기와 속도로 맞서려 했다. 정부에 건조 자금 융자를 요청하고 여러 조선소에서 견적까지 받았지만, 큐나드 이사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주주들이 비행기가 하늘을 덮은 마당에 승객을 빠르게 실어나르는 전통적인 원양 운송업에 거액을 쏟아붓는 것은 무모하다며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큐나드 경영진은 배의 쓰임새를 운송에서 관광으로 바꿨다. 속도로 비행기를 이길 수 없다면 선내 체류 자체를 상품으로 파는 크루즈로 가자는 결단을 내렸다. 새로 설계한 선박은 여름철에만 대서양을 건너고 겨울철에는 따뜻한 해역을 도는 역사상 첫 이중 목적 선박으로 건조됐다. 과거 정기선은 일등석과 일반석 승객의 동선과 식당을 분리했다. 이 배는 모든 승객이 라운지, 극장, 수영장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갑판을 수평으로 개방한 "단일 등급(one-class)" 공간 구조를 도입했다.
선박의 규격도 대서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대폭 줄였다. 과거 대서양 항로를 맡은 대형 여객선들은 덩치가 너무 커서 파나마 운하를 지나지 못했지만, 퀸 엘리자베스 2호는 파나마 운하 갑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너비를 맞추고 흘수도 낮췄다. 덕분에 배는 대서양에 갇히지 않고 태평양과 지중해를 자유롭게 오갔다. 여기에 설비를 간소화해 하루 연료 소비량을 구형 선박의 절반으로 낮추면서, 큐나드는 연간 100만 파운드의 연료비를 아낄 수 있었다.
위기를 넘긴 큐나드는 20년쯤 흐른 뒤 배의 추진 기관을 통째로 교체했다. 고장이 잦았던 증기 터빈을 뜯어내고 디젤 발전기 9대와 모터로 구동하는 디젤-전기 추진 방식을 도입하자, 하루 연료 소비량이 다시 35% 줄어들며 선박의 수명은 20년 더 늘어났다. 퇴역하기까지 이 배는 40년 가까이 580만 해리를 항해하며 300만 명의 승객을 실어나르는 기록을 세웠다. 정기 여객선이 목적지로 가는 이동 수단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배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되는 현대 크루즈 산업이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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