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프랭클린 은행 파산...사기범 단죄 넘어 첫 국제 건전성 규범 출범
사상 최대 은행 파산의 충격...글로벌 금융 안전망 바젤 체제 출범으로

1974년 10월 8일 미국 은행 감독을 맡은 통화감독청이 프랭클린 내셔널 은행의 파산을 공식 발표했다. 이 은행은 1926년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지역 주민을 상대로 영업하는 상업은행으로 출발했다. 그로부터 48년이 흐른 파산 당시에는 자산이 37억달러로 미국 20위에 올라 있었다. 이처럼 자산이 큰 은행의 파산은 당시 미국 사상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지점 창구에 몰려든 프랭클린 내셔널 은행 예금자들은 1달러도 잃지 않았다. 금융 당국이 밤새 자산과 부채를 우량 은행으로 넘겨 영업을 이어간 덕분이다.
이 은행의 예금자를 보호한 조치는 은행 파산이 단순한 기업 청산을 넘어 금융 시스템 전체에 연쇄 지급불능을 부를 수 있다는 위험과 관련이 있었다. 이에 미국 예금보험공사는 평소처럼 보험 한도만 지급하고 영업을 끝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인수자를 찾아 예금 전액을 넘겼다. 연방준비제도도 파산 발표 직전까지 할인창구를 열어 17억달러의 긴급 자금을 투입하며 지원을 맡았다.
파산에 이르기 전 프랭클린 내셔널 은행은 롱아일랜드의 지역 은행으로 출발해 드라이브스루 창구를 열고 현대적 신용카드를 처음 선보이며 혁신의 상징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맨해튼 중심가로 진출한 뒤 무리하게 대출을 늘렸고 지배지분이 이탈리아 금융업자인 미켈레 신도나에게 넘어갔다. 은행을 인수한 신도나는 변동환율제가 시작되자 은행 자금으로 외환 투기를 벌이다 막대한 손실을 냈다.
손실 규모가 드러나자 예금자들은 앞다퉈 예금을 인출했다. 예금 인출이 이어지고 은행이 파산한 뒤에는 경영진과 신도나가 사기와 회계 조작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에서 신도나는 미국 법원으로부터 중형을 선고받았고 본국으로 송환된 뒤 교도소에서 숨졌다. 대중의 분노는 부실 경영진과 신도나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책임자를 감옥에 보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범죄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금융 감독의 빈틈이 메워지지는 않았다. 프랭클린 내셔널 은행의 파산에 앞서 그해 여름 독일 헤어슈타트 은행이 외환 거래 손실로 쓰러졌을 때도 국제 결제망이 마비됐다. 두 은행이 외환 거래로 손실을 본 당시, 대형 은행들은 해외 지점을 열고 유로달러와 외환을 거래하고 있었지만 어느 나라도 국경 밖의 위험을 감시하지 못했다. 책임자를 처벌해도 국경을 넘는 은행을 통제할 규칙이 없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이런 감독의 빈틈이 드러난 뒤, 프랭클린 내셔널 은행 파산 두 달 뒤인 그해 12월 주요 10개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스위스 바젤에 모였다. 총재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대형 은행을 공동으로 감독할 상설 기구인 바젤 은행감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 위원회를 통해 각국 감독기구가 정보를 나누고 해외 점포의 건전성을 함께 점검하는 최초의 국제 규범이 여기서 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공동 감독은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전 세계가 함께 평가하는 제도로 이어졌다. 바젤 위원회는 은행이 위험자산을 보유할 때 갖춰야 할 최소 자본 비율을 8%로 규정했다. 이 최소 자본 기준은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세계 모든 은행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BIS 비율의 바탕이 됐다. 그날 프랭클린 내셔널 은행의 파산은 국제 금융의 기본 틀이 된 감독 기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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